2008년 11월 14일
곧 스타벅스에 가야하는 이유
요즈음에는 과제 및 그 밖의 연유(가 심야 오락 프로그램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로 잠이 부족하다. 그래서 등교길에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 이르러서는 반쯤 감은 눈에 대략 안개 낀 정신상태로 내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휘청거리며 한 시간 만에 다시 땅을 밟은 이른 아침이었다.
하얀 서리가 내리고 있는 빨간색 바탕에 변함없는 초록색 그 로고.
어느 여학생이 들고 있던 스타벅스 컵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떠올렸다. Toffee nut latte.
12월의 어느 날, 매우 친한 일본친구가 고국으로 떠난다며 파티를 준비한 날이었다. 바다가 내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Davie Street의 그 Safeway의 창가 테이블에서 나는 파티에 함께 갈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는 두꺼운 외벽용 유리를 중심으로 바깥의 둔중하면서도 매서운 찬 기운과 안쪽의 소박하면서도 축제적인 따스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마법같은 그 위치였다. 30분인가를 보냈는데, 즐거운 일정을 앞두고 있기도 했고 좀처럼 마주하기 힘든 마법같은 순간을 포착한 터에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거대한 공간을 메우고 있는 아이보리색 빛과 따뜻한 공기가 그냥 너무 좋았다.
친구가 근처에 다 왔다며 전화를 했다. 알았어, 나갈게, 라고 대답하고 나는 실내의 따스함에 해제했던 무장을 다시 바로 한다. 옷 무장도, 마음의 각오도. 그런데 그 때 시야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으니, 슈퍼 안에 입점해 있는 스타벅스의 promotion sign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무심히 지나쳤을텐데, 그 때는 한국에서는 생전 듣도보도 못한 toffee nut latte라는 것을 판다니 눈길이 멈췄던 것 같다. 얼른 친구를 만나러 나가야하니 혼자 추측하며 시간 끌고 있을 수는 없고, 용감 게이지 최고조에 달해 있었던 당시의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혼자 쿠키 정리만 열 번째 하고 있던 것 같아 보였던 그에게 묻기에 이르렀다. What's in this?
뭐라고 설명해 주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굉장히 사랑스럽고 나긋나긋한 톤으로 설명해 주던 그의 얼굴만큼은 그 공간의 따스한 공기와 함께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게다가 설명을 끝낸 그가 물었다. Would you like to try? 아마 나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웃으면서, Why not?
절대 신뢰해서는 안될 나의 감성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깔루아와 시나몬을 넣어 그 신기한 음료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스테인레스 주전자에서 음료 스티밍을 마치고는 시음용 종이소주잔보다 조금 클 법한 깜찍한 사이즈의 빨간 크리스마스 에디션 종이컵에 솜씨 좋게 옮겨 담았다. 마지막으로 휩 크림까지 푸슉슉 돌려 얹고는 짜잔, 증정식! 이런 상황에서 웃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아주 훈훈해진 마음으로 컵을 받아 든 나는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며 친구를 향해 급한 발걸음을 했다.
이리하여
대한민국 서대문구 신촌동의 버스 정류장에서 무방비 상태로 마주한 빨간 컵이
오늘 내 가슴에 추억의 소용돌이를 일으킨 것이다.
나이가 들 수록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지만, 우리 가슴 속에 고이 간직된 추억은 그 어떤 화려한 외부 자극보다 강하게 우리를 움직인다. 그 효과 또한 순간적 감상을 넘어서 그 날 하루 전체의 감성을 들었다 놓는 수준에 이른다. 빨간 컵에 담긴 토피넛라떼가 얼마나 맛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추억과 기억, 이들은 그냥 그 자체로 형언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 by | 2008/11/14 17:11 | onion: thoughts | 트랙백 | 덧글(1)



